타르
감독 : 토드 필드
출연 : 케이트 블란쳇, 노에미 메랑 등
러닝타임 : 158분
영화 포인트
① 인생과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 그것에 뒤따르는 모든 것은 그저 감수할 수밖에!
② 케이트 블란쳇이 위대한 이유!
③ 막 장대한 음악 흘러나오고 감동적인 지휘에 가슴을 적시는 그런 흔한 음악영화 아닙니다!
1. 주절주절
이런 영화인지 몰랐습니다. 전 이 영화가 음악 영화이고, 여성 지휘자의 감동적 지휘와 연주에 힘을 실은 영화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초반 오프닝크레디트가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깔린 검은 바탕 위에 마치 엔딩크레디트처럼 좌라락 올라갈 때도, 역시 음악영화군, 독특해, 라며 건너뛰기 없이 모두 봤습니다. 그리고 중반부까지도 주인공 리디아 타르의 긴 인터뷰 장면, 지인들과의 대화 장면, 학생들에 대한 강의 장면 등, 별 다른 사건 없이 흘러가는 영화를 (아주 잠깐 졸기도 하며) 나름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일반인인 제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영화는 인내심과 집중력이 대단히 많이 필요한 영화입니다. 참고로 저는 케이트 블란쳇의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며 그 시간을 버텼습니다.
2.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 스포일러 주의 바랍니다.)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 분)는 성공한 여성 지휘자입니다. 그녀는 레즈비언으로, 그녀가 속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스트 샤론과 부부관계이며 그들에게는 사랑스러운 딸도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크리스타라는 여성 제자가 있었는데 과거에는 돈독한 관계였던 그들이 어떤 사유에서인지 멀어지게 됩니다. 타르의 비서 프란체스카에게 크리스타는 계속 이메일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가 지금 심각하다는 것을 알리는 이메일이었음에도 타르는 냉정합니다. 그러는 동안 타르는 매일 밤 어떤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집을 돌아다니며 그 소리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면서, 곧 있을 공연 준비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타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비서에게 전해 들은 타르는, 슬픔으로 눈물 흘리는 프란체스카에게 자신과 크리스타 사이에 오갔던 이메일을 모두 삭제할 것을 제일 먼저 명령합니다.
한편,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첼리스트로 들어온 올가에게 타르는 관심을 갖습니다. 타르는 공연의 마지막 음악을 첼리스트의 독주가 들어가는 곡을 선정합니다. 관례대로라면 이미 오케스트라에서 연륜을 쌓은 첼리스트가 독주를 해야 하지만, 타르는 오디션을 제안합니다. 이 모든 게 올가를 염두에 둔 행동이지요. 블라인드 오디션에서 만장일치로 올가가 선택되고, 다시 오케스트라는 공연 준비를 이어갑니다. 타르는 부지휘자를 해고하는데, 해고당한 부지휘자뿐 아니라 그녀의 스승도 그 자리에 비서인 프란체스카를 앉히려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공정성을 의심받는 것에 화를 냅니다. 사실 타르는 프란체스카를 부지휘자로 발탁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카가 크리스타와의 이메일을 모두 삭제하라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말이지요. 타르는 프란체스카에게 그녀가 부지휘자로 뽑히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고, 그다음 날 프란체스카는 비서 자리를 그만두고 자취를 감춥니다. 크리스타의 죽음에 타르가 연관이 됐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이 상황에, 프란체스카는 크리스타 측 변호인의 증인으로 출석할 것이라는 사실을 타르는 알게 됩니다. 타르를 둘러싼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집니다. 결국 타르는 지휘자 자리에서 해고되고, 샤론과의 관계도 끝장납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명성과 지위를 가지고 타르는 어느 작은 아시아 쪽 나라에서 지휘를 맡게 됩니다.
3. 이 영화,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 케이트 블란쳇이면 말 다했지.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할 때부터 케이트 블란쳇을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하긴, 제가 감독이었어도 케이트 블란쳇과 같이 작업을 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영화마다 놀라울만큼 그 캐릭터에 몰입합니다.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란 배우는 없고, 언제나 그녀가 맡은 그 인물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녀는 그냥 리디아 타르였습니다. 제가 봤을 때 타르는 내면에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마에스트로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용할 줄 알며, 자신의 욕망에 무엇보다 충실합니다. 새로운 첼리스트를 향한 뚜렷한 관심도 그러하고,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타르가 그녀의 어린 딸을 괴롭히는 아이를 학교에서 만나 협박을 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세상 온화한 얼굴로 그 어린아이에게 다가간 후, 자기 딸을 괴롭히면 너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른인 제가 봐도 오싹할 만큼의 차가운 표정으로 겁을 주는 그 눈빛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앞에서 타르라는 인물이 일반적 통념보다는 개인적 욕구와 욕망에 더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민하고 통제적인 그녀의 성향은 조용한 새벽마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집안의 소음을 찾아 그것을 없애는 몇몇 장면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누군가를 배려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가차 없이 매정하게 그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크리스타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가 어느 오케스트라에도 몸을 붙이지 못하도록 관련자들에게 메일을 보내 크리스타에 대한 과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시에 그녀는 내면적으로 죄책감과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리디아 타르라는 인물은 참 복잡하고 다면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 타르를 케이트 블란쳇은 정말 완벽하게 연기합니다.
- 마에스트로, 레즈비언, 아이의 아빠, 그리고 타르
영화 초반 타르의 인터뷰 장면과, 줄리어드에서의 강의 장면은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제가 봤을 때, 생전 처음 듣는 생소한 음악가들의 이름들 때문인지 약간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돌려봤습니다!) 이 두 장면은 타르라는 인물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타르는 과거보다는 현재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곡을 해석할 때도 현재의 악보에 담긴 작곡가의 의도와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요. 줄리어드에서 강의를 할 때, 바흐의 생을 통한 가치관이 자신의 그것과 맞지 않아 바흐의 음악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학생에게 타르는 집요하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지시키려 합니다. 바흐의 인생과는 상관없이, 음악에서 느껴지는 뭔가를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지휘자의 몫이라는 것이죠. 이런 장면들을 통해 타르라는 인물이 왜 그토록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 자신의 음악과 지휘는 자신의 삶과는 다른 선상에 놓여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지니는지, 자신이 어떤 인간이고 어떤 사생활을 숨겨두고 있는지는 자신의 공적인 음악생활과는 별개입니다. 타르는 그저 현재의 삶, 현재의 음악을 즐깁니다. 좋은 변화든 나쁜 변화든, 변화는 그저 타르에게 당연한 것이고 그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잡음과 소란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죠. 결국 그래서 타르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 마지막 장면의 의미
누렸던 명성과 지위를 뻿기고 타르는 아마도 태국으로 여겨지는 나라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태국의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하는데, 이 공연에서 지휘자인 그녀는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또 무대 뒤편으로는 하얀 스크린막이 내려와 문양이 그려진 황금색의 휘장 같은 것이 비칩니다. 그리고 곧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5함대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땅으로의 출발을 알리는 비장한 내레이션입니다. 그 내레이션이 흐르며 관객석을 비추는데, 관객들은 정말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들처럼 각양각색의 sf적 의상을 차려입었고 중간중간에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우주 생물로 보이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저는 다소 황당한 이 마지막 장면이 어쨌든 타르의 희망을 짐작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 전에 타르는 아주 옛날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유명 지휘자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 지휘자는 기쁨이나 슬픔, 증오, 사랑 같은 것은 말로 할 수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하고 강렬한 감정들은 음악으로만 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이 공연에서 타르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 의미를 지금 현재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자 합니다. 타르가 관객들과 함께 가고자 하는 그곳이 우주라면 관객들은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타르가 생각하는 음악은 그런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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