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
감독 : 마틴 맥도나
출연 :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등
러닝타임 : 114분
영화 포인트
① 인간이라는 존재 내면에 사는 밴시, 서로에게 밴시가 될 때 삶은 끔찍해진다!
② 우리는 서로를 100% 이해 못 해. 그러니 노력하거나 존중할 필요가 있지!
③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멋진 연기
1.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 스포일러 주의 바랍니다.)
이니셰린은 아일랜드의 어느 작은 섬마을 이름입니다. 파우릭(콜린 파렐 분)은 여느 날처럼 가장 친한 친구인 콜름(브렌단 글리슨 분)의 집에 찾아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콜름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파우릭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합니다. 그렇게 파우릭은 콜름에게 절교를 당합니다. 파우릭은 여동생 시오반의 집에서 살고 있고, 소와 말을 키우며 집안일을 거들고는 있지만 실은 하는 일 없이 친구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하루의 중요한 일과인 사람입니다. 그런 파우릭에게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는 황당함을 넘어서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까 파우릭에게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콜름은 파우릭과의 의미 없는 수다가 싫어졌으며 남은 생은 가치 있는 음악을 남기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파우릭은 콜름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 했으며, 그래서 콜름에게 몇 번이나 화해를 시도합니다. 콜름은 한 번만 더 자기에게 말을 걸 경우엔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까지 말했으나, 파우릭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술에 잔뜩 취해서 또 콜름을 찾아간 것이죠. 바이올린을 잘 켜는 콜름은 처음엔 손가락 하나를 잘라 파우릭의 집 현관에 던졌고, 그래도 파우릭이 말을 안 듣자 나중엔 나머지 손가락 네 개를 모두 잘라 현관에 던져버립니다. 그 와중에 동생 시오반은 본토에 일을 구해 파우릭의 곁을 떠났고, 자신이 아끼던 제니라는 당나귀는 버려진 콜름의 손가락을 먹이인 줄 알고 삼키다가 죽어버립니다. 파우릭은 분노합니다. 제니를 땅에 묻고 콜름을 찾아간 그는 정확한 일시를 알려주며 그날,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미리 경고한 그날 파우릭은 콜름의 집에 불을 지릅니다. 콜름의 애견을 타고 온 마차 뒷자리에 싣고 떠나려던 파우릭은 머뭇거리며 집안을 들여다봅니다. 콜름은 불붙기 시작한 집 안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파우릭은 그대로 마차를 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음날 콜름의 애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파우릭은 해변에 서 있는 콜름을 만납니다. 콜름은 파우릭에게 제니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하며 또한 자신의 애견을 돌봐줘서 고맙다는 말도 건넵니다. 파우릭은 별말 없이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2. 이 영화,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 이니셰린의 밴시는 뭘까
이니셰린이라는 지역도 처음이거니와, 단어 역시 익숙한 영미권식 영어는 아니라 생소한 느낌이 듭니다. 아일랜드에 무지한 저의 탓도 있겠지요. 게다가 그 생소한 지역명에 밴시라는 듣도보도 못한 단어까지 더해지니 당황한 저는 처음에 사람의 이름이겠거니 추론했었습니다. (이건 저 말고도 다른 분들도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영화 속에서는 밴시를 나쁜 기운을 가진 귀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밴시는 켈트족의 민담에 나오는 초자연적 존재라고 하네요. 밴시가 밤에 우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가족 중에 누군가 죽는다고 하니 좋은 귀신은 확실히 아닌 듯합니다. 영화 제목 이니셰린의 밴시는 콜름이 파우릭과 절교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희생하며 만들어낸 곡의 제목입니다. 콜름은 파우릭과 절교하게 된 이유를, 이제는 의미 없는 수다로 시간을 허비하며 보내기보다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무언가를 남겨놓고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에게도 콜름은 말합니다. 죽는 것을 기다리며 그저 시간만 축내고 있는 것 같다고, 이제는 그것을 참을 수 없어졌고, 시오반 너도 그렇지 않으냐고 말입니다. 콜름은 특별한 일이란 게 없는 이 적적하고 작고 외로운 섬마을에서, 남은 삶은 다르게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콜름에게, 남은 삶도 지금까지처럼 살고 싶은 파우릭은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앞에서 알짱거립니다. 콜름의 밴시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보여주는데도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해하지 못하는 파우릭, 이 작은 섬마을과 여러 의미로 작은 이웃들, 그리고 끝내는 이 작은 섬마을과 이웃들을 떠나지 못할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후반에는 파우릭 역시 밴시를 발견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는데, 몇 번이나 화해를 요청했는데도 오히려 잔인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게다가 결국엔 자신의 사랑하는 당나귀마저 죽게 만든, 콜름. 그리고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무례하고 비정했던 파우릭 자신.
그러니까 이니셰린의 밴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욕망, 결핍, 폭력성, 편견 등 부정적인 요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잉글랜드 내에서의 IRA의 독립운동을 중간중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섬 건너 땅에서는 총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니셰린의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일 이야기하듯 무심하기만 합니다. 아마도 표면적으로는 이니셰린에서 가장 나쁜 인간인 경찰관은 심지어 IRA 단원의 사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전쟁과 전쟁에 엮인 사람들의 여러 사정, 정황 등도 역시나 밴시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 작은 것들에 대한 배려
콜름이 교회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손가락 때문에 파우릭의 당나귀 제니가 죽게 된 것을 고해성사하는 콜름에게 신부는 당나귀 따위가 죽은 게 뭔 대수냐고, 하느님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거라고 말합니다. 콜름은 신부의 말에 그게 어쩌면 모든 것의 문제일 거라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립니다. 그러니까 콜름은 하느님이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에도 신경을 썼다면 모든 게 더 좋아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섬마을의 경치 외에도 동물들의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꽤 있습니다. 염소, 말, 소의 얼굴을 말이죠. 그리고 콜름은 계속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파우릭에게 자른 손가락까지 서슴없이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속 시원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손가락 때문에 죽은 당나귀에 대해서는 고해성사까지 할 정도로 죄책감을 갖습니다. 물론 당나귀란 생명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도 있겠지만 파우릭이 얼마나 당나귀 제니를 사랑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 제니의 죽음에 분노한 파우릭이 콜름의 집을 찾아갔을 때 집에는 콜름의 개만 있었습니다. 영화는 파우릭이 그 개를 죽일 것 같은 분위기로 슬쩍 몰아가는 듯했지만 파우릭은 개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내가 왜 너를 죽이겠느냐고, 너는 콜름의 마지막 다정함인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온 콜름은 파우릭에게 자신의 개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전합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의외로 아주 소소하고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요. 그 작고 소소한 부분이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한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그 소소하고 작은 부분이 남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려하고 세심하게 신경 써 준다면 확실히 많은 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콜름과 파우릭의 이 작은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되는 끔찍한 전쟁들도 줄어들 수 있었겠지요. 밴시의 울음이 누군가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는 민담 속 이야기도 어떻게 보면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의 상처는 분쟁의 전초가 확실합니다. 그 상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분쟁을 막을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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