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과 분노
저자 : 윌리엄 포크너
번역 : 윤교찬
출판사 : 열린 책들
책 포인트
① 욕망과 고통 속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울려 퍼지는 고함, 분노!
② 어렵지만 읽어봐야 하는 책!
콤슨가 사람들의 이야기
십여 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다른 출판사에서 '음향과 분노'라고 제목 붙인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게 됐습니다. 좋아하는 저자의 책이라서보다는 사실 이 책의 화려한 명성 때문에 선택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책은 10페이지도 못 읽은 채 다시 도서관에 반납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당최 이게 뭘 말하려는 책인지 끝끝내 흥미를 못 느꼈기 때문이죠.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어쨌거나 책을 완독 하는 것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왜 십여 년 전에 초반 부분에서 제가 흥미를 못 찾았는지, 그 이유도 알게 됐습니다.
이 책은 크게 4개의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 단락은 콤슨가의 막내아들인 벤지의 시선에서 전개됩니다. 벤지는 지적장애를 가진 성인입니다. 덩치는 크지만 지능은 세네 살 정도의 어린아이죠. 콤슨 가는 미국 남부의 유명 가문으로 그의 집안에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흑인 노예들이 있습니다. 지적장애를 가진 벤지는 이성보다는 자신의 감각으로 사물을 느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벤지가 주변을 보는 방식, 사람과 상황에 대한 감정과 그 표현 등을 책 속의 인물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여 년 전의 저도 이게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라고 핑계를 대 봅니다.)
두 번째 단락은 콤슨가의 첫째 아들 퀜틴의 시점입니다. 퀜틴은 하버드대에 입학한 수재입니다. 그의 아버지 콤슨은 퀜틴을 위해 가문 소유의 목장을 팔아 그를 대학에 보냅니다. 퀜틴에게는 바로 밑에 캐디라는 여동생이 있는데, 캐디는 어린 나이에 어느 남성과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게 됩니다. 퀜틴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저는 퀜틴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약간 혼란스러웠습니다. 퀜틴은 아버지에게 캐디가 임신을 한 것은 바로 오빠인 자신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게 된 것이라면 캐디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부도덕적 행위를 감출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문과 가족에 대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어마무시한 자부심과 명예욕이 있는 사람이라고 퀜틴을 백번 이해하려 해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퀜틴이 캐디를 남매지간으로써가 아니라 남녀로서 바라본 것이라면, 그 행동은 전자보다는 쉽게 이해가 갑니다. 책 속에서 퀜틴이 캐디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여동생을 대하는 묘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퀜틴은 뱃속의 아이로 인해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고, 얼마 후 퀜틴은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콤슨가의 셋째 아들 제이슨이 화자입니다. 제이슨은 자신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오랜 시간 같이 살아온 집안의 흑인노예들에게도 손톱만큼의 따뜻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돈입니다. 누나인 캐디의 딸, 퀜틴을 맡아 키우면서 그 대가로 캐디에게서 받은 돈을 악착같이 자신의 주머니 속에 모아둡니다. 조카인 퀜틴에게 중간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죠. 제이슨은 술 때문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고, 큰형은 아버지가 집안의 재산까지 처분하며 대학에 보내줬는데도 물에 빠져 죽어버린 데다, 누나인 캐디는 제이슨을 은행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매형과 이혼하여 그 약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설상가상 캐디의 딸 퀜틴을 (빼앗아) 키워주고, 병약한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제대로 일하는 것 없이 빈둥대는 흑인노예들 여럿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제이슨은 자신을 돌아오는 혜택 하나 없이 억울하게도 모든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불쌍한 가장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상대에게 빈정대며 불만투성이인 거죠.
네 번째 단락은 콤슨가의 늙은 흑인노예 딜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딜지는 콤슨가의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따뜻합니다. 사실상 콤슨가의 4남매와 캐디의 딸 퀜틴까지 키워낸 사람은 딜지입니다. 친어머니마저 외면하고 무시하는 벤지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사람 역시 딜지입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콤슨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붕괴하고 무너지는 와중에서 가장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기둥 같은 존재가 딜지라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The Sound and the Fury
고함과 분노, 혹은 소리와 분노로 번역되는 책 제목은 솔직히 너무 딱딱하고 추상적입니다.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 하나 없이 제목만 보고 책을 고르라 한다면, 과연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읽고 나면 이해가 되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책의 내용 역시 제목만큼이나 추상적이고 어렵거든요. 벤지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도대체 이게 뭔가,라는 인내심을 갖고 읽어내는 부분이라면, 퀜틴의 시점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는 정신 바짝 차리고 맥락을 따라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퀜틴 의식의 흐름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왔다 갔다 하는데, 솔직히 그저 대략적인 이해만 하고 훌렁훌렁 넘어가며 읽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 파악하다가는 중간에 이 책을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벤지와 퀜틴의 이야기는 1929년 출간됐을 당시에는 놀라운 소설 기법으로 추앙받았을만합니다.
제이슨과 딜지의 이야기는 이해도 면에서 훨씬 수월합니다. 특히 제이슨의 남다른 빈정거림은 책 속의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더라고요.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저는 제이슨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해의식과 우울함을 매정함과 빈정거림으로 감추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책 제목은 벤지의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벤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고함과 울부짖음으로 표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지는 주변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정상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감각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다시 고함과 울부짖음으로 표출하죠. 벤지가 지적 장애를 이유로 자신의 모든 감정을 고함과 울부짖음을 통해 표면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사실 콤슨가 사람들 역시 이성으로 억제하고 있을 뿐 그들의 내면에서는 벤지만큼의 고함과 분노가 요동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들 모두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퀜틴과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제이슨, 캐디, 캐디의 딸 퀜틴은 각자의 삶에서 버둥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콤슨가 사람들의 이야기만은 아닐 겁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역시 밖으로 내지르지 못하는 고함과 분노, 울부짖음을 가슴속 깊이 숨겨두고 있지 않나요?
콤슨 집안이 그렇게 붕괴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목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되짚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명작은 그래서 언제나 회자되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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